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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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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대법원의 법관해외연수계획에 따라 1995. 8. 15.부터 1996. 7. 15.까지 약 11개월간 영국 런던대학의 한 칼리지인 UCL(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객원연구원(Academic Visitor)으로 체류한 바가 있다. 해외연수를 떠나는 대부분의 판사들이 그렇듯이 필자도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인데다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책에서만 읽고 사진으로만 보던 현장을 확인하고 싶은 의욕으로 가득찬 채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 최초로 서양견문을 떠났던 100년전의 유길준 선생을 생각하면서... 이글은 그렇게 다녀온 나의 영국 견문록이다. 지면관계상 이 글에서는 주로 영국의 대학과 법조를 중심으로 써보기로 한다.

런던의 중심부에 위치한 런던대학 (ucl)

UCL은 본래 학문적 전통주의를 고집하던 Oxford와 Cambridge에 대한 반발로서 보다 자유롭고 보다 진보적이며 보다 실천적인 대학을 1800년대 초기 유럽 제1의 도시였던 런던시내에 세워 보고자 했던 움직임 속에 탄생하였으며, UCL의 정신적 지주는 공리주의 법철학의 대가인 Jeremy Bentham이다. UCL 본부건물 구내에는 Bentham의 실물크기와 똑 같은 사람 모형이 유리관 속에 앉아 있는데, 실제의 Bentham이라고도 한다. 영국 최초로 유태인, 비국교도 및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입학이 허용된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UCL은 런던대학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우수한 학생이 몰리는 College로서 런던대학내의 대부분의 칼리지가 런던시내에 위치하여 캠퍼스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데 비하여 UCL은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하여 있으면서도 캠퍼스의 구색을 최소한도로나마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런던대학내 다른 칼리지들의 대부라고 할 수도 있다.

아주머니 같은 Dawn Oliver 학장

8월의 따끈한 햇볕속에 지도를 보며 20여분을 헤매다가 찾아낸 Euston역 앞의 Endsleigh Gdns.의 한 모퉁이에 위치한 법과대학 건물은 Jeremy Bentham을 기념하여 Bentham House라고 불렀는데 일견하여 외관상으로도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가 있지만 건물내에 설치된 승강기가 문이 이중으로 되어 있어 내부에서 격자형 철제문을 수동으로 여닫아야 하는 그야말로 영화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시설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족히 100년은 지난 건물일 듯하였다.

건물안은 때마침 방학중이어서 쥐죽은 듯이 조용하였는데, 건물 2층의 학장실에 들어선 순간 나는 저으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Dawn Oliver라는 이름의 학장과 그동안 서신을 여러차례 교환하면서 나는 상대방이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대면하고 보니 여자였던 것이다. 나를 초청하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고 편지를 주고 받다니...하는 자책감을 황급히 접어두고 권하는 의자에 앉아 Oliver학장이 손수 가져다 주는 영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홍차에 우유를 부은 Indian Tea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비교적 마른 체격의 Oliver학장은 친절하고 자상한 아주머니 같이 그동안의 여행이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고는 주로 나의 거처와 자녀들의 교육문제, 대학까지의 교통문제, 나의 지도교수에 관한 문제 등을 이야기 했고, 내가 공부방으로 이용할 수 있는 Staff Study Room의 열쇠를 봉투에 넣어 주면서 친히 그곳과 내가 들려야 할 International Office 및Language Center를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금년이 한국의 근대사법이 100주년이 되는 해라는 점을 상기시킨 후 서울에서 가져간 기념 우표첩을 주었다. 그녀는 대단히 기뻐하며 기념첩의 사진이 대법원건물인지를 묻고 우표의 도안이 저울인 것을 가리키며 Justice의 상징은 어디에서나 똑같다는 소감을 피력하였다.

길안내를 받으며 걸어가는 도중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놀랍게도 자기 남편도 Tax Court의 판사라며 한국에도 그런 법원이 있는지를 물었고, 내가 영국에서의 관심사항을 제조물책임이라고 써 보낸 것과 관련하여 왜 대학시절에는 공법(Public Law)을 전공했다가 판사가 된 후에는 사법(Private Law)을 연구하는지를 묻기도 했다. 이 문제는 영국의 경우 판사도 전공별로 정해진 분야만 다룬다는 점과 관련된 질문이었다. 고색창연한 대학 건물들 사이로 때이르게 간간히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Cambridge 출신의 영국 헌법학계의 중진인 여성 지식인과 한국과 영국의 사법제도의 차이등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걷는 것은 영국생활에서의 산뜻한 출발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Oliver학장은 내가 판사라는 직함을 가졌기에 상당한 예우를 하여 준 셈이었고 나는 그녀의 친절함에 진심으로 감사하였다. 그러나 그 친절함이라는 것은 내가 영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마주치게 되는 수많은 친절함의 시작일 뿐이었다.

대학에서는 매 첫 학기가 되면 새로 바뀌는 교수진과 강사진 그리고 교직원 이외에도 새로 오게된 Academic Visitor들을 소개하는 유인물을 게시하고, 또 전체 교수 및 교직원들이 모여 새로 온 Academic Visitor를 포함하여 교수와 교직원들을 환영하는 파티를 하며 그 파티에 참석하라는 초청장을 학장의 이름으로 보내곤 하는데, 나도 그 초청장을 처음으로 받게 되었다.

이곳의 Academic Visitor는 세계 각국의 대학에서 주로 젊은 교수들이 오는데 초청장과 함께 동봉된 유인물에는 5명의 새로운 Academic Visitor중 내가 제일 먼저 소개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를 소개하는 부분을 읽던 중 나는 또 한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는 분명히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Southern Branch of Seoul District Court)의 판사라고만 밝혀 왔었는데 유인물에는 남부지원장(President of Southern Branch of Seoul District Court)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이는 필시 District Court에다가 Branch이면 대개 판사가 1명이거나 2명 정도인 영국의 예에 비추어 보아 판사의 수가 40명에 이르는 거대한 한국의 Branch를 생각할 수 없었던 Oliver학장의 지레 짐작 때문에 비롯된 것일 터였다. 그러나 나는 결국 내가 지원장이 아니라는 점을 해명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어쨋든 참석여부를 회신해 주어야 하는 파티의 초청장을 받고 나는 상당히 설레는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외국에서 맞는 이른바 파티라는 것에 처음 참석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것이 어떤 것일까하는 호기심에다가 혹시 나에게 인사말이라도 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멋있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실제로 내가 해야 할 말을 구상하기도 해 보았다. 그러나 Bentham House 1층의 Keeton Room이라는 곳에서 열린 파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도 작을 뿐 아니라 차려 놓은 음식도 별것이 없었다.

저녁식사시간임에도 식사는 나오지 않고 한쪽에서 와인과 음료수를 대학생 몇 명이 서비스를 하고 중앙에는 과일과 샌드위치 및 과자류 등을 차려 놓고 이것을 접시에다 조금씩 담아다 먹으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었는데, 물론 그 음식의 양이나 질은 우리 나라의 변호사 개업식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못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영국생활을 겪으면서 그 정도는 상당히 잘 차린 음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 만큼 그들의 생활이 검소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준비했던 인사말도 빛을 볼 수가 없었다. 학장은 파티에 인원이 거의 모였다고 생각될 즈음에 조그만 쇠막대기를 두드려 주의를 모은 다음 새학기에 달라지는 점 등을 안내하고 이어서 새로운 스태프로서 새로 부임한 교수들에 이어서 나를 포함한 Visitor들을 소개하였는데, 소개받는 사람은 손을 들어 누구인가를 알리고 간단한 목례 정도를 하는 것으로 소개가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 40여명에 이르는 교수, 강사 및 Visitor들과 한꺼번에 만나서 서로 얼굴을 익히고 누가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친교의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용하고 의미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도 이 파티에서 교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Visitor로 싱가포르, 일본, 이스라엘에서 온 교수들은 물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변호사까지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교수들은 나를 보고 한국에서 온 판사는 처음 본다면서 관심을 표하였다. 나의 전임자들이 여러명 이곳에 왔었음에도 그 분들은 대개 공부를 위해 학생의 신분으로 왔었기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였다.

그리고 이 파티에서 나는 내가 영국에서 만난 최고위직 법관이었던 High Court의 John Dyson판사를 만나 소개받게 되는 큰 수확을 올렸다. 그는 그의 부인이 UCL의 학생상담교수로 근무하는 관계로 이 파티에 참석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전날 영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IRA 테러리스트들에 관해 형기만료로 인한 석방판결을 내려 신문에 그의 이름이 대서특필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은 1976년에 20년형을 선고받은 IRA 소속 테러분자들이 1995. 7.로 형기가 만료되었음에도 영국 내무성은 그들이 테러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계속 억류하자 당사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였고 Dyson판사는 영국정부가 이들을 계속 억류하는 것은 유럽인권협약의 정신이나 영국 Common Law에 비추어 명백히 불법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이 판결은 나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임에도 영국정부는 강력한 불만을 나타냈고, 신문은 정부의 불만을 크게 보도하고 있었으며, 특히 그 전날 유럽인권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에서 10년전에 영국경찰이 IRA 테러리스트들을 사살한 것은 불법이라고 판결을 내린 일이 있었고, 이에 대해 영국 전역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히 항의하는 분위기에서 나온 판결이어서 IRA를 옹호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IRA 문제는 영국의 골칫거리이다. 벌써 수십년째 테러가 이어지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결말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무고한 사람들이 그들의 테러로 목숨을 빼앗긴지 벌써 몇 년째인가? 그러다 보니 영국사람들의 공적 제1호는 바로 IRA라고 할 지경이고, 그런 분위기이다 보니 형기가 만료되어도 석방시키지 않는 것이 공익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은연중 공감을 얻고 있다고도 보였다. 그런 분위기속에서도 법치주의는 살아있다는 것을 Dyson판사는 보여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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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을 불러달라는 Ewan McKendrick 교수

UCL에서 나의 지도교수는 민법중 채권법을 강의하는 스코트랜드 출신의 Ewan McKendrick 교수였다. Oliver학장은 McKendrick 교수의 스코트랜드 억양 때문에 내가 말을 잘 알아 듣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많이 하여 주었었는데, 막상 만나서 이야기 하여 보니 특별한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아마도 무엇이 스코틀랜드 억양인지도 잘 몰랐던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일부 잉글랜드 사람들은 스코트랜드 사람들을 북부의 촌사람들이라고 은근히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고, 일부 스코트랜드 사람들은 잉글랜드가 원래 독립국가였던 스코트랜드를 침략하여 합병시켰던 역사적 사실로 인해 잉글랜드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코트랜드는 대외적으로는 영국 즉 Great Braiton의 일부이지만 사법(司法)제도는 잉글랜드와는 다른 제도를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고, 시민사회에서는 스코트랜드의 독립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꾸준히 있어 왔다. 그리하여 Tony Blare정부에 이르러서는 스코트랜드 독자의 의회를 구성할 수 있게까지도 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축구경기 등 각종 운동경기에서는 잉글랜드와는 별도의 팀을 출전시키고 있었는데, 96년도 유럽컵 대회가 열리고 있을 때 내가 본 어떤 스코트랜드 사람은 잉글랜드가 스페인과 경기를 하면 스페인을 응원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평야지대로서 주로 목초지가 많고, 도시화가 일찍 진행되었으나, 스코트랜드는 산악지대가 많고 도시화가 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사람들의 기질이 잉글랜드에 비하여 보다 순박하고 친절하다고 할 수 있다.

Ewan McKendrick 교수는 그런 스코트랜드 출신이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한 연배였고, Edinburgh대학을 졸업하고 Oxford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그곳에서 부교수로 있다가 내가 갔을 때 마침 UCL에 교수로 부임하던 참이었다. 그는 나와 인사하는 자리에서 자기 이름을 소개한 뒤 자신을 아무개 교수라고 부르지 말고 자신의 이름 즉 Ewan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그것은 다소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면서 나를 어떻게 불렀으면 좋겠는지를 물어 나도 그에 상응한 조치를 취해야 했고, Oliver학장을 비롯한 다른 교수들이 나를 Judge Hong이라고 불렀으나 Ewan에게만은 Il-Pyo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렇게 하니 그와 더욱 가까워 질 수 있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그것은 형식을 싫어하는 그의 체질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스코트랜드 사람의 기질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었다.

Ewan은 영국 생활내내 나에게 가장 잘 해준 사람이었다. 그는 지도교수라는 책임감에서인지는 몰라도 내가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으면 나의 집으로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관심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우리 가족은 그의 초대로 런던 북부에 있는 그의 집에 두 번이나 놀러가서 식사를 하였고, 우리 집에도 그의 가족들을 초대하여 한국 음식을 대접해 보기도 하였다. 그의 집은 런던 중심부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 북부의 Harpenden이라는 교외에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한 곳에 있었는데 지은지 20년 되었다지만 새집처럼 깨끗하고 밖의 자연경관을 만끽할 수 있도록 밝고 아늑하게 지어져 있었다. 방이 5개도 넘는 것 같았는데 부엌옆에는 Dining Room이 따로 있어서 최소한 10명 이상이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 있는 장방형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근처에는 골프장이 있고 주위에는 은퇴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주변의 주택들도 비슷한 규모로서 영국 중산층의 전형적인 주택으로 생각이 되었고, Ewan은 280,000파운드(95년도 환율기준으로 3억5천만원 정도)를 주고 자신의 아버지가 사주었다고 했다.

그의 부인 Rose는 간호사 출신으로 잉글랜드 사람이었는데 적당히 큰 키에 상냥하고 밝은 성격으로 아주 착한 인상을 주었다. 그녀에게서는 남편의 출신지인 스코트랜드에 대한 어떤 편견이나 지역감정도 찾아 볼 수 없었고, 또 그녀는 외국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우리집에 왔을 때 한국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였다. 그들 부부가 우리를 초대하여 식사를 할 때 내온 음식은 감자 으깬 것, 당근 으깬 것, 콩 삶은 것, 파셀리 그리고 닭고기 몇 조각에다가 와인과 오렌지 쥬스가 전부였다. 나는 처음에는 이것이 시작이려니 생각했었는데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 음식은 더 나오지 않고 바로 디저트가 나왔다. 사실 영국인들 스스로 영국 음식은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고들 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은 먹는 것 자체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우리네 한국인들이 먹는 것에 너무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언제나 배가 부르도록 먹고, 또 다 먹지도 못할 것까지 차려 놓고 먹어야 푸짐하게 잘 먹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음식문화는 다분히 낭비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영국인들은 먹는 것 자체보다도 먹는 동안 이야기하는 것을 더 즐기는 듯하기까지 하였다. 우리도 Ewan의 집에서 먹는 것은 별것이 없었지만 바깥의 정원과 잔디밭이 내다 보이는 아늑한 방에서 지극히 착하고 부드러운 Ewan부부와 그야말로 친절하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며 식사시간을 보냈다.

Ewan은 딸만 넷이 있었는데 큰 아이가 당시 8살 정도였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 장남감을 내놓던 중 내가 우리 아이들은 Lego를 너무 좋아 한다고 하였더니, Ewan은 놀랍게도 자신이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오래된 Lego를 가지고 와 보여주었다. 솔직히 나는 Lego라는 것을 어릴 때에 보지도 듯지도 못했음은 물론 결혼하고 나서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것을 좋아하기에 비로소 알게 된 것이었는데, Ewan이 Lego를 가지고 놀았던 때는 아마도 1960년대 초기쯤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Lego를 가지고 놀 수 있었던 어린이는 몇 명이나 될까? 영국은 확실히 우리보다는 부자였고 선진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놀랐던 것은 40세가 넘도록 자기가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자기의 자식들에게 다시 그것을 물려 준다는 사실이었다. 영국인들만큼 역사와 전통을 잘 보존하고 계승하는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영국인들은 골동품을 좋아한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오래된 것일수록 가치가 있다고도 한다. 조부모나 부모가 쓰던 것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여 다시 씀으로써 그들은 어떤 일체감과 연속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골프장에 가보면 허름한 백에 낡아 빠져 지금은 나오지도 않는 옛날 골프채를 가지고 와서 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물론 그들은 취미로서 운동삼아 골프를 치는 아마츄어들이기에 자기 할아버지가 치던 골프채를 가지고 아무런 문제 없이 골프를 즐기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들은 우리네들의 끊임 없이 새것을 추구하는 문화와 너무나 비교가 된다. 새것은 물론 발전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옛것을 송두리째 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은 항상 많은 비용과 역사의 단절을 가져온다. 역사가 살아 있는 나라! 이것을 Ewan의 집 한 구석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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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보면서 재판하는 법정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Royal Courts of Justice는 런던 시내에 있는 영국 법원종합청사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대법원장은 상원의장을 겸임하는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데 대법관 12명으로 이루어진 대법원(House of Lords)은 의회의 상원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이하의 법원 중 항소심 법원인 Court of Appeal과 제1심이지만 중요한 민사, 행정, 가사, 기타 특별사건들을 재판하는 지방고급법원이라고 할 수 있는 High Court가 Royal Courts of Justice에 있다. 그리고 이들 법원들을 가리켜 Supreme Court라고 부른다. Court of Appeal에는 32명의 법관이, High Court에는 96명의 법관이 있다. 중요한 형사사건을 제1심으로 다루는 Crown Court와 가벼운 민사사건을 다루는 County Court의 법관들을 단순히 Judge라고 부르는데 비하여 Court of Appeal과 High Court의 법관들은 Justice라고 부르며, Justice라고 불리우는 법관들은 기사작위(knighthood)가 자동적으로 부여되고, 대개 법조 경력 25년 이상이 되는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의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Justice가 될 수 있다는 점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고등법원 부장판사 정도의 위상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내가 UCL의 개강파티에서 만난 Dyson판사도 나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Mr Justice Dyson"이라고 부른다고 적어 주었었다.

Royal Courts of Justice는 웅장한 석조건물로서 일반 관광객도 자유롭게 출입을 할 수 있다. 입구에는 검색대가 있어 모든 출입자는 이곳을 통과해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카메라의 반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아무리 떠들썩한 사건도 재판광경을 카메라에 담아낼 수가 없다. 신문에는 재판광경을 스케치한 그림이 실릴 뿐이고, TV에는 Royal Courts of Justice의 정문을 들어가거나 나서는 재판 관련자들의 모습이나 그들과의 인터뷰가 나올 뿐이다. 이는 카메라가 법정의 엄숙한 분위기를 해칠 수 있고, 재판받는 사람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고려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Royal Courts of Justice에 몇 차례 가서 재판광경을 지켜본 일이 있었는데, 맨 처음 법정에 들어갔을 때의 인상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의 판사들이 하얀 가발을 쓰고 재판을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놀랍기만 한 것이었다. 나는 영화나 소설에서 가발 쓴 판사의 모습이나 그림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옛날 이야기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문명이 발달하여 우주에 사람이 왔다 갔다하는 시대에 중세에서나 어울릴 것만 같은 가발을 쓰고 앉아 있다니...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생각에 전통을 지독할 정도로 고수하는 이들의 문화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가발을 쓴 판사의 책상위에 노트북 컴퓨터가 놓여 있고, 판사는 그 컴퓨터의 화면을 수시로 들여다 보면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UCL의 교수들에게 물어 보니 그 판사는 노트북 컴퓨터를 통하여 아마도 판례를 검색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가발쓴 판사와 노트북컴퓨터! 중세에나 어울릴 것만 같은 가발과 현대문명의 상징인 노트북컴퓨터가 공존하고 있는 이 법정의 모습은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현대문명을 추구하는 오늘의 영국의 모습을 단적으로 상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있는 법정의 크기는 그렇게 큰 편이 아니다. 그리고 법대의 높이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은 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법대의 높이가 너무 높아 권위적이거나 비민주적이라는 여론 때문에 오늘의 높이로 낮추었으나 법대의 높이와 민주주의가 반드시 어떤 함수관계가 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었는데, 민주주의의 모범국이라는 이곳의 법정을 보고 나의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들어가 본 법정에서는 마침 12명의 배심원이 참석한 가운데 민사사건의 증인신문이 실시되고 있었는데, 증인신문중에 판사가 수시로 개입하여 불확실한 점을 확인하고 있었다.

변호사들도 가발과 검은 가운을 입고 있었고, 발언을 할 때에는 반드시 일어나서 발언을 하였으며, 그렇게 일어나서 발언할 경우에 대비한 듯 마이크가 천정에서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이곳에서의 재판은 구두변론주의가 철저하게 시행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으로서 진행되는 사건의 수가 적다는 점이다. 내가 들어가 본 법정의 경우 재판기일표에 오전내내 단 두 사건만이 심리되고 있었다. 그 두 번째 조건으로서 법정안에서 진술하는 내용이 녹음이 되고 또 속기사들에 의하여 거의 빠짐없이 기록된다는 사실이었다. 진행되는 사건의 수가 적으므로 방청석이 넓을 필요가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법정이 10명 미만의 사람들만이 방청객으로 와 있었고, 방청객용 의자로 보아 방청객은 20명 정도 밖에는 더 수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법정을 드나드는 재판관계인들은 반드시 법정 출입구에서 판사를 향해 가벼운, 그러나 정중한 목례를 하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서양사람들에게 있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기 때문에 판사에게만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법원의 권위를 높게 생각한다는 뜻으로 받아 들여졌다.

Dyson판사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나는 다시 한번 영국 법원의 내부구조와 판사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약속된 아침 10시경 Royal Courts of Justice에 도착하여 검색대를 통과하자 키가 크고 나이가 60은 되어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한국에서 온 Judge Hong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는 Dyson판사의 서기(Clerk)라고 소개한 뒤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하였다. 그는 마치 영화 "Bat Man"에 나오는 Bat Man의 늙은 집사와 아주 닮은 모습이었다. 그를 따라 미로처럼 얽혀있는 계단을 오르고 그의 ID 카드로만 열 수 있는 문을 3개 정도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Dyson판사의 집무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판사실, 나아가 법원전체의 보안 시스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ID카드를 이용하여 법원관계자만이 문을 열고 들어 올 수 있도록 함으로써 불필요한 사람의 출입을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을 그토록 많이 찾아 오는 일반 관광객에게 공개를 하고서도 업무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에 오기 직전 서울의 남부지원에 근무하면서 모 방송국 TV 카메라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판사실은 물론 지원장실까지 무단으로 출입하며 찍어 방송에까지 내보냈던 사건을 경험했던 나로서는 이곳의 ID카드 시스템이 부럽기만 하였다.

그 뒤로 경험한 일이지만 영국의 관공서는 대체로 공무원과 민원인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는 인상을 깊게 받았다. 경찰서에 가더라도 민원창구 이외에는 더 이상 민원인이 접근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여기에 비하여 우리의 경우는 대개의 관공서는 물론 법원도 대부분 무조건 밀고 들어오는 외부 사람을 차단할 적당한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어쨋든 Dyson판사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반갑게 맞아 주는데, 방의 크기는 우리나라 서울고등법원의 배석판사실 정도되는 크기였고 물론 Dyson판사 혼자만이 사용하고 잇었으며, 책장이 한켠에 있으나 꽂혀 있는 책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건물 자체가 이미 오래전에 지어진 석조 건물이고 천정이 다소 높은 편이어서인지 웬지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사환으로 근무하는 여직원이 없었고, 심부름 시킬 것은 그 늙은 서기를 시켰다. 서기가 Tea를 가져오자 Dyson판사는 나에게 오늘 자기가 재판할 사건의 윤곽을 5분 정도에 걸쳐서 설명을 하여 주었다. 그 내용은 홍콩인이 연루된 사기사건이었는데 그는 자기 사건은 민사사건이어서 지루할 테니 조금만 보다가 다른 법정에 가보라고 권유를 하였다. 그리고 법정에 들어갈 시간이 되어서 법복을 입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법복은 상의와 하의에다 조끼를 별도로 입고, 목부분을 감싸는 흰 스카프와 어깨로부터 가슴을 가로지르는 붉은 띠를 비롯하여 모두 차려 입는데만 5분은 족히 걸릴 정도로 복잡하였고, 또 서기의 도움이 없이는 혼자서는 입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법복을 입고 마지막으로 가발을 쓰고 보니 화려함과 정중함이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법복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영국의 법복만큼 복잡하고 다양하기도 드물다. 영국 사법부의 계층구조는 위로는 대법원으로부터 밑으로는 치안판사법원에 이르기까지 5 - 6 단계로 나눌 수 있고, 각각의 법원에 대응하여 법관들도 계층적으로 구분되는데, 각 계층마다 각기 다른 법복을 입고 있으며(다만 대법관과 치안판사는 법복을 입지 않는다), 의전용 법복과 통상의 재판시의 법복이 서로 다르며, 어떤 경우에는 민사재판과 형사재판의 경우에 입는 법복이 서로 다르기까지 하다. 이러한 현상은 영국이 성문법 국가가 아니라 불문법 국가라는 점에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의 사법부는 성문법에 근거하여 어느날 갑자기 탄생하고 조직된 것이 아니다.

성문법에 의한 일률적인 규제를 받지 않고 수백년에 걸쳐 관행적으로 존재하여 온 각급의 법원제도를 유지하여 오다가 보니 각급의 법원에서 입는 법복이 서로 다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되풀이 언급되는 원인은 역시 그들이 옛것을 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전통에 대한 애착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한 쪽에서는 복잡한 법복제도에 대한 비판론도 있다. 특히 가발의 경우에는 그것을 쓰는 이유가 판사의 연령과 성별을 드러나게 하지 않고 익명성을 기하려는데 있다는 것이나 과연 법정에서 가발을 쓰고 안 쓰고의 차이가 그런 목적 달성에 어느정도 기여하는가에 대한 회의론도 만만치 않고, 특히 그것이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며, 그리하여 외부에서 사법부를 시대착오적인 특수계층으로 묘사할 때마다 단골로 그려지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93년도에 판사들과 재야 법조인들 및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가발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쪽이 대다수로 나타났다. 사회는 신분사회에서 계약사회로 넘어간지 오래고 그들의 mind도 계약사회의 것을 따라갔겠지만 옷만은 신분사회의 것을 그대로 입고 싶어 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옷은 바로 그들 신분의 상징이 되고있다. 신분에 따른 문화적 구분이 엄존하고 또 그것을 대다수 시민들이 받아들이는 사회! 그것이 바로 영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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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들의생활

Dyson판사의 안내로 그가 재판하는 법정을 둘러본 이후로도 나는 UCL교수들의 소개로 영국의 판사들을 더 만나 보았다. 그중의 한 사람은 내가 살고 있던 Surrey주의 Kingston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는 Wallington Crown Court의 Circuit Judge인 Simon Pratt판사였다. 그는 50대 초,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마음씨 좋은 시골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는데, 역시 나에게 Tea를 직접 타 주었고, 판사실은 화장실과 세면대가 딸려 있는 것이 특이 하였다. 그는 또 나에게 오늘 진행할 사건의 개요를 설명해 주었는데, 그것은 어느 Mini Cab 회사에 근무하는 피고인이 서류를 위조하여 1992년부터 1년간 보험료 10만 파운드를 편취하였다는 내용이었고, 이 재판은 3일전에 시작되었는데 앞으로 4주 정도 계속될 것이며, 그 4주 동안은 오직 이 사건만을 재판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나를 법정에 데리고 들어가 법대위의 판사석 옆에 준비된 의자에 앉도록 배려하였다. 순간 방청석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곧 한국의 Juge Hong이라고 방청석에 소개를 한 뒤 자기들이 재판하는 사건이 한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해진 것 같다는 농담을 하자 방청석에서 일제히 가벼운 웃음이 일었다. 나중에 들어본 그의 지론은 법정의 분위기는 항상 진지하고 엄숙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문제도 판사라면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이다. 재판진행을 잘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법정의 분위기는 어떤 정도를 유지하여야 하는가? 엄숙함을 강조하다 보면 재판에 관여하는 당사자들이 위축되기 쉽다.

그렇다고 마냥 풀어져 시장바닥 같아 버리면 재판의 권위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엄숙하면서도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권위가 있는 것! 그것은 결국 재판장의 전인격적인 노력과 재판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협조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오늘 재판은 변호인측 증인에 대한 신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증인은 오른손을 성경에 얹고, 왼손으로는 선서문을 읽는 방식으로 선서를 했다. 법정의 우측에는 배심원 12명이 앉아 있는데 넥타이를 맨 사람은 하나도 없고 평상복을 입고 모두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Pratt판사는 신문이 계속되는 동안 두툼한 대학노트에 계속해서 메모하고 있었다. 판사 앞에는 가발을 쓴 두사람의 Barrister들이 각기 자기들을 도와주는 2명의 Solicitor들을 뒷자리에 배석시킨채 증인신문에 나서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검사를 대행하는 Barrister는 이 사건에 한해서만 검찰을 대리하는 것이고 이 사건 재판이 끝나면 일반적인 Lawyer로서 다른 사건을 수임하는 변호사로 활동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검찰조직(Crown Prosecution Service)은 1986년에 비로소 창설되었는데 우리나라와는 판이하다. 영국에서의 범죄의 수사권은 주로 경찰이 가지고 있고, 검찰은 주로 공소유지만을 담당하고 있는데, Barrister출신의 검사가 거의 없어 Barrister만이 참석할 수 있는 Crown Court이상의 법정에서 형사재판이 열릴 경우에는 일반의 Barrister중에서 검사로 활동하도록 의뢰를 하여 그로 하여금 검사를 대행하게 한다. 다만 치안판사법정에서는 Solicitor도 참석할 수 있고, 검사들이 대개 Solicitor출신이어서 치안판사법정에서는 검사가 직접 소송을 수행하게 된다. 영국 법조계에서 검사는 아주 인기가 없는 영역이어서 주로 Solicitor들이 지원을 하고 있는데 그나마도 지원자가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점심시간에 Pratt판사는 근처의 식당에서 샌드위치를 주문하여 가져오게 한 뒤 그날 민사재판을 하러 온 District Judge인 Nick라는 판사를 나에게 소개시킨 후 셋이 같이 포도주를 들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날 배달된 샌드위치는 커다란 은쟁반에 여러 조각이 담겨져 있었는데 Pratt판사는 오늘 샌드위치가 아주 맛있게 만들어졌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나로서는 다소 실소가 나오는 장면이었는데, 도대체 손님접대를 위해 샌드위치 정도를 주문하고서는 그것이 그렇게 맛있다는 등 만족해 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실 영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샌드위치와 햄버거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런데 영국에서 생활해 보니 직장생활이건 여행이건 점심식사로서 그것들만큼 많이 먹게 되는 것도 없을 지경이었다. UCL교수들의 점심도 특별한 약속이 없는 경우에는 대개 샌드위치 몇 조각으로 해결을 한다. 시간에 쫒기는 수 많은 샐러리맨들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고... 판사들도 대부분 점심식사는 샌드위치로 해결하였고, 나중에 만나본 다른 어떤 판사는 그 샌드위치를 집에서 만들어 도시락처럼 싸가지고 오기도 하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날 Pratt판사의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었다는 그 흡족한 표정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들의 생활이 본래 검소하여 손님이 온다고 크게 호들갑을 떨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매일 먹는 샌드위치도 맛있는 게 있고 맛없는 게 있었을 테니까...

같이 점심을 먹은 Nick판사는 Solicitor출신인데, 판사가 되고 보니 Solicitor였을 때보다 훨씬 편하고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럽에서 Common Law System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영국과 아일랜드뿐이고 나머지는 대륙법계로서 판사 임용에 관하여 Career System을 가지고 있는데(우리나라도 마찬가지), 프랑스 판사들의 경우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 30분까지 일해야 하는 격무에다가 월급도 200만원 정도밖에 안되어 자기네의 절반수준이라며, 자기는 영국의 제도가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월급으로 따진다면 세계에서 영국의 판사들 만큼 많이 받는 경우도 없을 것이나, 이는 영국에서의 판사는 상당한 법조 경력을 쌓은 사람들 중에서 임용하기 때문에 그 경력에 걸맞는 대우를 하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쨋든 1995년도(당시 환율은 1파운드당 1,250원, 1998년 9월 현재는 2,250원 정도) 당시의 연봉이 대법원장은 124,000파운드, Court of Appeal의 법관들은 110,000파운드, High Court의 법관들은 99,000파운드, Crown Court의 Circuit Judge들은 72,000파운드, County Court의 District Judge들은 60,000파운드 정도를 받고 있었다. 결국 95년도 환율로 Nick판사는 월 600여만원, Pratt판사는 월 700여만원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Pratt판사는 Barrister출신으로 이미 20세 전후의 자녀들이 있고, 12년간 Recorder를 역임하였으며 작년에 Circuit Judge로 임용되었다는 것이므로 그의 법조 경력은 적어도 22년이 넘는 셈이다.

Recorder란 기본적으로 변호사이나 1년에 20일 내지 50일 정도만 법관으로 임용되어 재판을 하는 이른바 part-time 법관을 가리킨다. 이는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그 예를 찾아 보기 어려운 영국만의 특이한 제도로서 전문 법관들의 업무량 해소에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Recorder중에서 주로 Circuit Judge를 임용함으로써 법관으로서의 자질 검증 기회도 되고, 법관으로서의 훈련과정의 역할도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제도이다.

Recorder는 변호사로서 10년 경력을 요한다. 현재 영국에는 Circuit Judge가 전국에 517명 가량되는데(영국에서 판사로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고, 일반적으로 판사라고 하면 바로 Circuit Judge를 연상하면 된다), Circuit Judge가 맡는 일을 분담하여 처리하여 주는 Recorder는 900명이 넘고, Assistant Recorder까지 합하면 1,200명이 넘는다. 변호사들을 part-time으로 판사로 임용하여 일을 하게 하는 것은 살인적인 업무량 폭증에 시달리고 있는 요즈음의 한국 판사들에게는 업무량을 경감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방안으로 생각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는데, 요즈음처럼 법조인 전체가 불신의 늪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는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쨋든 나는 Pratt판사에게 Recorder의 공정성과 국민들의 신뢰감에 대하여 물어 보았더니 그는 영국에서는 Lawyer의 공정성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가 있으므로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되어 있다고 말했다.

Lawyer의 공정성과 관련하여 나는 당시부터 한국의 법조계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재조와 재야의 접촉의 정도에 관하여 물어 보았다. 즉, 당신은 판사인데 변호사들과는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특별한 문제의식이 없이 자기도 원래 변호사였으므로 지금도 변호사를 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이 있고, 일과후나 주말에는 변호사인 친구들을 만나서 어울리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랜 친구와 교분을 지속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참으로 원론적이고 한가한 이야기였다. 나는 차마 술을 먹거나 식사를 할 때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지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런 문제를 거론하며 판사는 변호사를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윤리강령을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낯뜨겁고도 서글픈 일이다. 판사가 누구를 만나든 그것은 그의 양식을 믿고 그의 자율에 맡겨야 할 일이지 이를 일률적인 지침에 의해 규율하려는 것은 대단히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국민의 법조에 대한 시각이 이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 원인에 대하여는 반성을 하여야 함을 전제로...

오후 4시경에 재판이 끝났다. 영국에서의 법정의 개정시간은 대체로 오전 10:30부터 13:00까지, 그리고 오후 14:00부터 16:30 또는 17:00까지이다. 그 이외의 시간은 판사가 임의로 사용한다. 출근시간이나 퇴근시간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판사에게 출퇴근 시간을 따지는 풍경이 가끔씩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판사의 양식을 의심하는 것이다. 영국에서 본다면 그것은 판사를 모독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기 일을 확실하게 한다면 재택근무를 한 들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 Pratt판사도 4시경 재판이 끝나자 퇴근준비를 하였다. 법원 뒤 편 주차장으로 나오니 그의 차와 내 차 2대만이 주차되어 있었는데, 그의 차는 우리나라의 엑센트 정도에 해당하는 중고 소형승용차였다. 영국에서 과거 한 때에는 판사가 운전기사 없이 손수 운전을 하여 출퇴근하는 것은 판사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논쟁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수십년전의 사치스러운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판사들이 승용차를 직접 운전하거나 런던 시내로 출퇴근하는 경우에는 대개 런던의 교외에서 기차나 전철을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고 있다.

내가 만난 또 한 사람의 판사인 Mrs Daphne Wickham도 그렇게 기차를 이용하여 런던시내로 출퇴근을 하는 판사이다. 그녀는 런던의 유흥가가 밀집되어 있는 West End지역을 관할하는 Marlborough Street Magistrates' Court의 유급치안판사(Stipendiary Magistrate)이다. UCL교수의 소개로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띄우고, 또 그녀에게서 답신을 받고 약속일시를 정하여 만나보게 된(영국에서 판사들과의 대부분의 만남은 이런 절차를 거쳐서 이루어 졌다) Wickham 판사는 Barrister 21년 경력의 머리가 하얀 조그만 체구의 여성 법조인이었다. 치안판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이것도 영국 사법제도의 특이한 존재이다. 치안판사는 간단히 말하면 가벼운 형사사건을 처리하는 판사들인데, 평인치안판사(Lay Magistrate)와 유급치안판사(Stipendiary Magistrate)로 구분된다. 전자는 순수 민간인들로서 part-time으로 근무하며 보수가 없이 약간의 교통비 정도만 받는 자원봉사자(우리나라의 조정위원에 비할 수 있다)인데 비하여 후자는 법조인의 자격을 가진 사람들로서 봉급을 받는 차이가 있다.

양자의 하는 일은 똑 같으나, 평인치안판사는 3명이 합의제로 재판하고(3명중 1명은 반드시 여자이어야 한다) 유급치안판사는 단독재판을 하는 차이가 있다. 보통 치안판사라고 하면 평인치안판사를 가리키는데, 치안판사가 처리할수 있는 사건은 6개월 이하의 징역형과 5,000파운드 이하의 벌금형을 선고할 수 있는 사건에만 국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안판사들은 영국 전체 형사사건의 95% 이상을 처리하며 매년 2,000,000명 이상이 치안판사법정을 거쳐간다. 물론 대체로는 경미한 교통법규 위반사범들이 많지만 개인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도 적지 않아 1992년도에만 15,000명의 성인범이 치안판사에 의하여 실형을 선고 받았다.

치안판사들이 전체 형사사건의 95%를 처리한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이로 인하여 영국의 정규 판사들은 5%의 어려운 사건에만 전념할 수가 있다는 것이 된다. 고급의 두뇌와 능력은 그에 걸맞는 고급사건에 투자하도록 하는 인력의 적정한 배치가 이루어 지고 있는 셈이다.

Marlborough Street Magistrates' Court는 1795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200년의 역사를 간직한채 운영되어 오고 있다. Wickham판사의 방에는 1795년부터 지금까지 그곳 법원에 판사로 부임하여 일한 유급치안판사들의 명단이 새겨진 Board가 걸려 있었는데, 1993년도에 부임한 Daphne Elizabeth Wickham이란 이름도 마지막으로 새겨져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200년에 걸쳐 어느 한 법원을 거쳐간 판사들의 이름을 적어 놓으려면 아마 한쪽 벽면을 다 채우고도 모자랄 수도 있겠지만 이곳 Board에 새겨진 이름의 숫자는 20명이 채 안될 듯 하였다.

이곳 법원에는 법정이 2개가 있고, 판사는 유급치안판사가 2명, 평인치안판사는 이곳을 포함하여 런던시내 3개의 치안판사 법정에 교대로 나가는 120명이 있어 그들중에서 순서에 따라 이곳 법정에 나와 재판을 한다고 한다. 1995년도에 런던에만 53명의 유급치안판사가 있고, England와 Wales 전체로는 90명이 있으며, 그중 11명이 여자이다. 영국의 여성 법조인의 수는 그리 많지는 않으나 점차 증가 추세에 있다. 1995년도에 대법관은 전부 남자이고, Court of Appeal에는 32명 중 단 1명만이 여성이다(1988년 최초로 임명되었다). High Court에는 96명중 6명 정도가, Circuit Judge 중에는 517명중 30명 정도가 여성이다.

Wickham판사는 치안판사의 업무를 비롯한 나의 잡다한 질문에 무려 2시간 이상에 걸쳐 성의껏 답해주었다. 영국의 형사절차는 제도적으로는 우리보다도 덜 정교한 듯하다. 경찰이 피의자를 체포할 수 있고 체포한 피의자에 대하여 1차로 구속, 불구속 여부를 결정할 수 있으며, 구속을 하기로 결정한 사람에 한하여 24시간내에 치안판사에게 보내어져 보석을 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게 한다. 보석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심문절차에는 검사가 출석하여 의견을 말하는데 항상 반대만 하는 것은 아니고 또 검사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것이 필수적인 절차도 아니다. 치안판사가 발부하는 영장(Warrant)이란 주로 벌금형 미납자에 대한 체포허가나 강제집행허가장이고 가끔 보석을 허가 받고도 불출석하는 사람에 대한 구속영장이 있을 정도라고 하였다.

Wickham판사의 안내로 별도로 날을 잡아 방청해 본 치안판사법정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법정중에서 우리나라의 형사법정과 가장 유사한 풍경이었다. 법정은 그리 크지 않았고, 방청객의 좌석은 유리로 격리되어 있었다. 검사와 변호사들이 같은 자리에 앉았고, 중앙에 Law Clerk이 앉았다. 치안판사 법정에서의 Law Clerk은 전문 법조인의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평인치안판사들에게는 법률적 조언을 하여준다. 판사가 입정하자 정리의 호창에 따라 전부 일어섰는데 Wickham판사는 "Good Morning!"이라고 인사를 하면서 들어와 앉았다. 그녀는 검은색 상의에 스커트를 입고 핸드백을 멘채 법정에 들어 왔다. 치안판사는 법복을 입지 않았다.

물론 변호사나 검사도 Solicitor출신들로서 법복을 입지 않고 모두 사복 차림이었다. 법정에는 사건을 호창하고 진행하는 또 한명의 직원이 있어 이번에는 사건부 몇번의 아무개 피고인에 대한 재판이 있겠다고 마이크로 알려 주었다. 피고인을 부르는 순서는 주로 변호인들이 도착한 순서대로 부르고 있었고, 속행사건과 신건을 섞어서 진행하고 있었다. 판결선고를 끝내면 판사는 당사자들에게 "Thank you very much"라고 인사를 했고, 피고인과 변호인 및 검사까지도 똑 같은 인사말을 하고 있었다. 변호사들은 변론시에 판사를 거론할 때 마다 "Madam"이라고 호칭하고 검사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에서는 판사도 여러 계층이 있는 만큼 호칭도 다르다. 치안판사들은 3인칭으로는 "Mr 아무개" 또는 "Mrs 아무개"라고 부르고, 법정에서는 "Madam" 또는 "Sir"라고 호칭한다. 그 윗 단계인 Circuit Judge는 3인칭으로는 "His(or Her) Honour Judge 아무개", 법정에서는 "Your Honour"라고 부르고, 기사작위가 부여되는 High Court의 판사는 3인칭으로는 "Mr(or Mrs) Justice 아무개", 법정에서는 "My Lord 또는 My Lady"라고 부르며, 역시 기사작위가 부여되는 Court of Appeal의 판사들은 3인칭으로는 "Lord Justice 아무개", 법정에서는 "My Lord"라고 부른다. 결국 호칭으로만 본다면 치안판사에 대하여는 판사로서의 특별한 대우를 하지 않는 셈이다.

오전중에만 약 14-5건의 재판이 있었는데, 피고인들의 5분의 4는 흑인 젊은이들이었다. 그 중의 18세된 한 흑인 젊은이는 슈퍼마켓에서 샴페인 한병을 훔쳐 가지고 나오다 경비원들에게 들켜 격투를 벌이다 잡혀 와 재판을 받고 있었는데, 기소요지에 대해서는 모두 유죄를 인정하고도 피고인 본인신문시에는 경비원들을 폭행하지 않고 뿌리치기만 했고, 자신이 폭행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Wickham판사는 나중에 판사실에서 그 사건을 설명해 주었는데 피고인은 이미 6주전에 구속되어 이 법정에서 범죄사실을 부인하며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 행하여지는 Crown Court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하여 자기들은 그 사건을 Crown Court로 보내기로 결정을 하였는데 검사가 그 사이에 증인의 진술서를 확보하는 등 증거 보완을 하는 동안 피고인이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치안판사에게서 재판을 받겠다고 하여 Wickham판사는 일정한 조건을 붙여 보석을 허가해 준 뒤 오늘 재판을 하고 있는 중이며, 선고는 3주 뒤쯤 할 예정인데, 그에게 어떠한 형을 선고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그는 강도짓도 했고, 폭력도 행사하는 등 전과가 여러번 있음에도 계속 비슷한 내용의 범죄를 반복하고 있어 그에게 4개월의 실형을 선고한들 감옥에 몇 주 있다가 나가면 도로 마찬가지 아니겠느냐면서 사회봉사명령 같은 것을 고려중이라고 했다. 치안판사는 징역형을 6개월까지만 선고할 수 있지만 Crown Court는 그러한 제한이 없기 때문에 피고인들은 치안판사법정과 Crown Court 사이에서 어느 쪽이 유리할 지 저울질을 하며 눈치작전을 펴는 셈이다. 그리고 아무리 가벼워 보이는 사건이라도 판사는 양형에 대하여 항상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새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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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제도

영국의 변호사가 Barrister와 Solicitor로 구분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전자를 법정변호사, 후자를 사무변호사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치안판사 법정 등 하위 법원에서는 Solicitor에게 변론자격이 있고, Crown Court이상의 고급법원에서는 원래 Barrister만이 변론자격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Solicitor라도 일정한 시험에 합격하여 자격증을 받으면 Crown Court 이상의 법정에서 변론할 자격이 주어 지게 되었다(1990년에 법이 개정되었고 1994년부터 시행되었다. 다만 실제로 그렇게 자격증을 취득하는 Solicitor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Barrister와 Solicitor는 여러 가지 차이가 많다. 우리나라로 치면 Solicitor는 변호사이긴 하지만 부동산의 등기관계 업무 등을 비롯한 법무사의 일을 더 많이 한다고도 할 수 있다. 변호사 즉 Bar라는 표현은 Barrister에게만 해당된다. 그리하여 Barrister 협회는 Bar Council이라고 하고, Solicitor 협회는 Law Society라고 부른다.

1995년경 영국에는 57,000명의 Solicitor와 7,700명의 Barrister가 있는데, Barrister나 Solicitor가 되려면

① 먼저 법대 3년 과정을 수료하고 법학사 학위를 취득한 다음(비법대 졸업생의 경우에는 1년간의 법률공부 과정을 거쳐 시험에 합격하여야 한다)

② Barrister의 경우에는 Inns of Court School of Law라는 일종의 법조인교육기관(우리나라의 사법연수원 기능을 한다)에 입소하여 1년간 기술적인 연수를 받고 시험(Bar Examination, 이것이 우리나라의 사법시험에 해당한다)에 합격하여야 하고, Solicitor의 경우에는 Law Society가 각 대학에 위탁하여 마련된 1년간의 Legal Practice Course를 이수한 뒤 역시 시험에 합격하여야 한다.

그리고 ③ Barrister의 경우에는 1년간, Solicitor의 경우에는 2년간의 수습기간을 거쳐야 한다. 이 수습기간을 Barrister의 경우에는 "Pupillage"라고 하고, Solicitor의 경우에는 "Articles"라고 한다. 한편 Barrister의 경우에는 Inns of Court School of Law에 입소하면서 그 유명한 4개의 Inn of Court(Lincoln's Inn, Grey's Inn, Middle Temple 및 Inner Temple)의 어느 곳에 소속되어야 하고, 전통적으로 이 Inn에서 24회의 식사를 하여야 한다. 반드시 선배들과 함께하는 이 식사 시간을 통하여 그 옛날 책이 귀할 때에는 책을 읽어 들려 주었고, 책이 흔한 요즘에는 공부의 필요보다도 예절 등을 포함한 책 이외의 것을 배우고 있다.

그런데 Barrister의 경우에는 이 기간 동안의 식사비용을 포함하여 일체의 비용을 자기가 부담하여야 하고, 또 처음 Barrister가 된 후 약 10년간은 지명도가 낮아 별 사건이 없으므로 전적으로 가정에서 후원해 주지 않으면 별다른 수입이 없으며, 더욱이 Pupillage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일할 변호사 사무실의 자리(seat 또는 tenancy)를 찾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출신 배경이 좋은 사람들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만일에 이를 찾지 못하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Barrister가 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시험에 합격하고 수습기간을 끝낸 사람들중의 40-50%는 Barrister의 길을 포기하고 다른 직장을 찾거나 또는 Solicitor로 전환한다고 한다. 이에 비하여 Solicitor의 경우에는 수습기간동안에도 Law Society에서 보수가 지급되고, Barrister처럼 tenancy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므로 최근에는 Oxford 나 Cambridge 출신의 유능한 인재들이 Barrister보다는 Solicitor를 더 많이 지원하는 현상 마져 보이고 있다.

Barrister나 Solicitor나 대체로 중산층(middle class) 출신들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돈이 없고 출신 배경이 별로 내세울게 없는 사람들은 자연히 Solicitor를 지망하게 되고, 돈이 많고 집안이 좋다는 사람들만이 Barrister를 지망하게 된다. 신분은 이렇게 하여 만들어지고 사실상 세습되는 것이다. 그리고 Barrister는 그들만이 이용하는 골프장이 따로 있고, 또 판사는 주로 Barrister중에서 임용되므로 판사들 역시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회의 보수적 기득권층에서 나오게 된다고 할 수 있다(학벌로는 과거에는 Oxbridge출신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그 비율이 현저하게 낮아 졌다). 그래도 그들은 각자 자기 분수에 맞는 쪽을 택하며 별 불만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

Andrew Watson은 내가 UCL의 세미나에서 만난 Barrister이다. 그는 Barrister로 활동하면서도 Inns of Court School of Law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일본의 대학에서 2년 이상 강의도 한 경험이 있는데, 법조인 양성에 관한 한국의 제도에도 많은 관심을 표명하여 나는 그와 자연히 가까워지게 되었다. 1996년 1월의 어느 추운날 그는 나를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내어 2시간여에 걸쳐서 Chancery Lane을 중심으로 포진해 있는 Inns of Court School of Law와 4개의 Inn을 일일이 순회하며 그 역사와 현황을 설명해 주었다.

4개의 Inn중 Grey's Inn이 가장 먼저 생겼고(14세기), 지금까지도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Inns of Court School of Law도 바로 이 Grey's Inn 구내에 있다. 대부분의 Inn의 공통적 구조는 건물 내부에 커다란 Dining Hall이 있고, Library가 있고, 또 부속 Church가 있다. 이중에 Inner Temple의 Church는 1185년경 건축된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 중세 영국 교회의 건축양식을 연구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Lincoln's Inn의 Dining Hall이었다. 200-300명이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 있는 크기이고 중앙에 장방형의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 모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기본적으로 짙은 붉은 색을 띠고 있어 상당히 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현직법관(Benchers)이 앉는 테이블은 조금 높은 곳에 놓여 있어 신분에 따른 차별화를 보여 주고 있다. 높은 천정은 암갈색 목조로 되어 있고, 한 쪽 벽면에는 이 Hall을 거쳐간 명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Henry 8세의 이혼을 반대하다 사형당한 당시의 대법관 Thomas More, 20세기 불세출의 강력한 지도자였던 Margaret Thatcher, 인도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Mahatma Gandhi, Jawaharlal Nehru등의 이름이 보인다. 참으로 역사적인 곳이다. 영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우리가 서양사 시간에 책에서만 들었던 이름이나 지명을 마주치곤 하는데 이곳도 바로 그런 곳의 하나다. 그들이 이곳의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역사적인 감회에 젖어보고 Hall을 나오면 정원을 ㄷ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Barrister들의 사무실(Chamber)이라고 한다.

런던의 경우 Barrister 사무실은 바로 이곳 4개의 Inn에 집단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Barrister가 혼자 사무실을 내어 활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편의와 전통에 따라) 여러명이 모여 우리나라의 합동법률사무소처럼 운영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여러명의 Barrister들이 한 사람의 Clerk을 두고 있다. Clerk은 Solicitor로부터 넘겨받은 사건을 최적임 Barrister에게 배당하고 Solicitor와 수임료를 협상하며, Barrister가 받는 수임료의 5% 내지 10%를 수수료로 받는다. 사무실에 따라서는 Barrister가 40명 내지 50명에 이르는 곳도 있으므로 그런 곳의 Senior Clerk은 대부분의 Barrister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올린다. 다만 최근에는 Clerk에게 일정한 봉급에다가 Barrister수입의 1% 내지 5%정도의 보너스를 주는 쪽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의 설명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Barrister는 사건을 고객으로부터 직접 수임하지 않고 반드시 Solicitor를 통하여 수임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반 시민들로서는 법률적 문제가 생기면 일단 Solicitor를 만나 상담을 한 다음 그가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은 그가 그 사건의 종류나 내용에 비추어 보아 그 사건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Barrister에게 의뢰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Barrister는 수임과 관련하여 직접 고객을 상대하지 않기 때문에 돈 문제로부터 품위를 지킬 수가 있고, 공정성과 사회적 신뢰를 얻고 있다. 이러한 사건 수임과정에서 사건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한 경쟁으로 금품수수 등의 비리가 있을 법한데도 그들 사회에서는 그런 유형의 비리가 아직까지 제기된 적이 없다. 그것은 아주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게임의 룰을 존중하고 법조인으로서의 품위를 돈 보다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영국의 변호사 제도중에서 또 한가지 특징적인 것은 Barrister도 두가지 계층으로 나뉜다는 사실이다. 즉 QC(Queen's Counsel)와 QC가 아닌 Barrister(이들을 Junior Barrister라고 한다)로 구분되는데, QC는 Barrister로서 15년 내지 20년의 경력을 쌓은 사람중에서 실력과 인품이 탁월한 사람을 선발하여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대법원장은 법정에서의 소송수행능력을 통하여 드러난 그의 능력과 인품에 관한 법원의 고위 법관들과 재야의 원로 변호사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QC를 선발한다. QC가 되려면 본인이 지원을 해야 되는데 1994년의 경우 지원자의 15%인 77명만이 새로운 QC로 임명되었다. QC는 전체 Barrister중의 상위 10%라고 할 수 있으며(1995년경 전부 900명 가량), 주로 이들중에서 High Court 판사가 배출된다. QC가 됨으로써 신분이 상승되고, 수임료가 높아져 수입이 증가하며, 많은 양의 서류작업(paper work)에서 해방된다.

QC는 법정에서 silk까운을 입으며, 법정에 들어 갈 때 반드시 자기를 도와 줄 Junior Barrister를 대동하는데, Barrister로서 아무리 오래 활동을 하였어도, 또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QC가 되기 전에는 Junior Barrister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QC제도는 위계(位係)를 존중하는 영국인들의 질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변호사란 단순한 사업자가 아니라 국가의 사법업무에 협조하며 그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공인(公人)이기에, 오랜 연륜과 경험을 가진 원로는 별도의 호칭과 대우로써 국가적으로 예우를 해주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제도는 우리나라도 도입을 검토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이후로 양적인 팽창을 거듭해 온 우리나라의 재야 법조에도 영국식 질서가 아쉬울 때가 많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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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시민정신

나는 런던에서 남쪽으로 기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Surrey주의 Surbiton이라는 소도시에 거주하였다. 우리의 이웃들은 모두 그리 넉넉치 못한 서민들이었다. 내가 거주하던 집과 울타리를 마주한 이웃에 살던 Jacky는 40대 후반의 이혼한 여자로서 그녀의 아들은 대학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했으나 취직자리가 없어 가까운 시내의 햄버거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한다고 했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동정심에서 너무 안됐다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그로부터 꼭 3년 뒤인 요즈음 나는 우리사회에서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 취직을 못해 아우성이라는 기사를 읽고 부끄러운 한숨을 길게 내쉬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의 영국사회는 우리가 겪었던 거품이 완전히 가셔서 너무나도 차분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침체되어 있는 듯이 보였던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는 내가 우리 아이의 피아노 공부를 위해 중고 피아노를 사러 갔을 때에도 느낄 수가 있었다. 피아노를 사고 판다는 지역신문 광고를 보고 찾아간 피아노 가게에는 100년된 피아노가 200파운드 정도에 버젓이 거래되고 있는 것이 놀라웠는데, 주인의 말에 의하면 100년전에 영국에는 피아노 조립공장이 40개가 있었으나 그 후로 점차 없어져 지금은 영국제 피아노를 만드는 공장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영국 경제의 쇠퇴를 단적으로 보는 것 같았다. 기실 영국은 지금부터 100년전에 세계 최강대국이었다. 그들의 군사력, 과학기술력이 세계 최고였고, 이를 바탕으로 가장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다.

영국의 면적과 인구는 현재의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친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조그만 나라가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세계 제1의 강대국으로 군림했던 것이다. 면적과 인구로만 보면 우리라고 세계 제1의 강대국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우리의 높은 교육열과 민족적 저력으로 보아도 더욱 그러하다. 다만 나는 영국인들의 생활속에서 우리가 배우고 본받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음을 느낀다.

먼저 그들의 검소한 생활과 예절과 친절함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이웃들은 그리 크거나 좋은 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집집마다 딸려 있는 조그만 정원을 대단히 정성스럽게 가꾸고 창문에는 꽃이 핀 화분을 여러개씩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대단히 존중하여 서로 침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도착하여 얼마되지 않아 그들과 친해지려고 포도주 한병씩을 선물했는데 그들은 대단히 좋아 하면서 우리가족에게 많은 친절을 베풀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친절과 여러 가지 선물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포도주 한병을 훨씬 상회하는 것을 돌려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여행을 하다가 길을 물어 보면 거의 모두다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자기 차를 타고 10여분 이상이나 나의 차 앞에서 운전을 하여 안내해 주기도 하였다. 횡단보도에서 보행인이 얼씬거리면 지나가는 차는 반드시 정차하여 보행인이 길을 완전히 건너간 다음에야 통과하는 보행인 위주의 교통문화 또한 돗보였다.

영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아이들이 다녀야 할 근처의 학교에 갔을 때의 일이다. 교장을 만나기 위해 교실 건물의 복도에 들어서서 잠시 게시판을 보니 누구든지 이 학교에는 땅콩이나 땅콩이 든 음식을 가지고 와선 안된다고 쓰여져 있었다. 나중에 교장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교장은 이 학교의 어느 한 어린이가 땅콩 알레르기가 있어 그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 전체 학생들에게 그런 금지조치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단 한 사람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대다수의 나머지 사람들이 불편을 참아 주는 것!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보호하여야 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장면이자 휴머니즘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순간이었다.

또 한가지 인상적인 것은 영국사회에서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하여 준다는 것이었다. 우리사회는 말을 못믿어서 항상 문서로 된 증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학교에 가서 우리 아이가 나이가 8살이라고 하면 그대로 믿어 굳이 출생증명서가 필요가 없고, 백화점에 옷을 바꾸러 가서 계산서를 분실한 경우에도 이곳에서 옷을 샀다고 하면 대략 확인을 하고는 그대로 믿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문서로 쓰고서도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 떼는 정치인들로부터,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 위장전입을 서슴치 않는 학부모들을 비롯하여, 그럴듯한 거짓말로 다른 사람에게 금전적 피해를 입힌 법정의 사기범들에 이르기까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영국이라고 사기꾼이 없을까마는 그 절대적인 숫자가 우리보다는 피부로 느낄만큼 적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을 영국의 학교에 보내보면 영국인들은 언뜻보아 별 경쟁심이 없는 것 처럼 보인다. 각 가정에서 어린이들에게 보이는 부모네들의 정열은 우리보다 훨씬 못하다. 영국의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한국인 부모네들의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교육열을 칭찬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네의 그 치열한 교육열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룩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우리가 서구 선진국을 따라 잡기 위해 지금까지 보여준 저력의 밑바탕에는 바로 그 교육열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그 무한경쟁을 추구하는 교육열이 무언가 방향이 잘못되어 있음을 느낀다. 영국인들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하라고 다그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질서를 지키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자녀들은 또 부모들 스스로의 생활에서 그런 것을 보고 배운다.

그리고 사회 전체가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예를 너무 종종 보게 된다. 우리도 한 때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예절을 아는 민족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는 도덕과 염치를 불문하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성공지상주의에 사로 잡혀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성공지상주의는 우리사회를 피폐하게 하고, 지치게 하며, 병들게 하고 있다. 사건유치 경쟁에서 빚어지는 법조 비리 사건들도 바로 그런 도덕을 건너뛰는 경쟁심과 성공지상주의의 폐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95년도를 기준으로 영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였고, 우리는 1만 달러를 넘보고 있었다. 우리의 그 1만 달러는 결국 거품에 의한 것임이 드러나 우리는 이미 경제의 양적인 성장에서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나, 경제적으로 우리가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의 질이 현재와 같다면 우리는 결코 영국보다 좋은 나라, 좋은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글을 마치며 영국의 좋은 점을 배우고 그에 대비되는 우리의 단점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교육의 중요성을 상기하고자 하며 그러한 면에서 영국인들의 교육철학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Bertrand Russell의 말을 떠올리고 싶다.

"우리의 교육의 목표는 무례한 천재보다 예절바른 시민을 만들어 내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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